고 안지호(2001년생)씨의 장례식장. 간신히 딸의 빈소를 지키던 엄마의 눈에 한 청년이 들어왔다. 노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그는 누구보다 슬픈 눈으로 영정을 바라봤다. 애써 기억을 더듬었지만 엄마는 그가 누군지 알아챌 수 없었다.
엄마에게 다가온 청년은 "제가 따님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는데 살리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딸의 유류품에 섞여 있던 낯선 재킷을 떠올렸다. 얼마나 급했는지 귀중품까지 그대로 담겨 있던 그 재킷은 차디찬 이태원 길에 누워 있던 지호씨에게 그나마 온기를 전한 물건이었다.
재킷의 주인인 청년은 장례식장에 대추차를 들고 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꼭 전하라'고 당부했다며 예쁜 통에 담긴 대추차를 지호씨 가족에게 건넸다. 딸이 떠난 뒤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엄마는 "너무도 따뜻했던" 그 대추차만큼은 마실 수 있었다.
빈소를 찾은 청년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겪은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오후 11시 정도부터 약 30분 간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이후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구급대원에 의해 지호씨가 옮겨졌다'면서 '쫓아가보니 문 닫은 편의점의 여러 시신들 사이에 지호씨가 놓여 있었다'고 전했다.
함께 이태원을 찾았던 단짝 친구 또한 지호씨의 그날 행적을 기억하고 있다. 오후 9시 30분 청구역에서 만나 이태원역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자신들 또한 인파에 휩쓸리고 말았다. 나중에 찾은 지호씨의 휴대폰엔 오후 9시 57분까지 찍은 인파 사진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지호씨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친구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는 지호씨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얼마 후 친구는 외국인들의 심폐소생술로 깨어났지만 더 이상 지호씨를 만날 수 없었다. 이때가 오후 10시 30분이었다. 지금도 친구는 지호씨 묘를 찾아 "보고 싶다"는 편지를 남기고 있다.
두 사람의 증언에도 지호씨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30분'은 여전히 백지로 남아 있다. 친구가 기억하는 오후 10시 30분과 심폐소생술을 한 청년이 기억하는 오후 11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국가는 그 30분, 아니 그 중 단 1분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지금껏 유족이 받아 든 문건은 당시 작성된 '구급활동일지'가 전부다. 참사 3개월 뒤 행정안전부의 안내에 따라 발급받은 이 일지엔 "이름 : 무명녀(無名女), 나이 : 30세, 이태원 재난 현장 압사 추정 사망자"라는 허망한 문구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딸이 목숨을 잃었을 때만큼이나 이 일지를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참사 후 5개월이 지난 현재도 정부의 발걸음은 이 일지에 멈춰있다.
"나 보러 올 땐 웃어줘."
지호씨가 생전 친구와 주고받았던 메모엔 이 같은 희망 묘비명이 적혀 있었다. 한참 뒤에 쓰여야 했을 이 문구는 너무도 빨리 묘비에 새겨지고 말았다.
딸이 남긴 말처럼 웃어야 하건만 묘비 앞에 선 엄마·아빠의 눈엔 자꾸 눈물이 고였다. 말없이 꽃과 과일을 내려놓은 부부는 눈물과 함께 연신 묘비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지호씨는 스타일리스트를 꿈꾼 열정 넘치는 대학생이었다.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분명히 알고,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다하던 아이"였던 지호씨는 패션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문소리 배우는 참사 한 달 뒤 열린 제43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자신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한 지호씨를 떠올리며 추모의 말을 남겼다. 엄마는 당시 문소리 배우를 되레 비난하는 이들, 특히 몇몇 기자에게 "내 딸의 행적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내용의 항의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엄마·아빠는 딸이 대학 수업 중 과제로 썼다는 유서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다들 이기적으로 남은 인생 즐기고 나 보러 와. 기다리고 있을게. 어떤 재밌는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줘." 지호씨 친구가 해당 수업의 교수에게 부탁해 받은 유서의 마지막 문구다. 엄마는 "우리 딸은 항상 저의 삶을 응원해줬다"며 "지호는 남겨진 가족들이 삶을 버리지 않고 행복을 누리길 바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호야!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지? 엄마·아빠·오빠도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 걱정하지 말고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 사랑 다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 우리가 너 보고 싶고 궁금해서 연락해도 신경 쓰지 마. 연락 안 해도 돼. 잘 지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을게. 그래도 가끔은 꿈에 나타나 주길 바란다. 잘 지내라 지호야! 사랑한다 지호야! 안녕."
낯선 조문객, 문소리의 추도...국가 대신 딸 지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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