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키즈 대한민국’ 넘어 ‘퍼스트 키즈 대한민국’으로》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이제 두 살배기가 된 제 아이와 함께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서봤던 기자회견장이었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은 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섯 페이지의 기자회견문을 읽는 동안
아이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이모삼촌들에게 관심을 표하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마이크와 카메라를 신기해하며 잡아당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준비한 회견문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애정과 응원의 눈빛으로 함께해주셨던 기자님들, 수어통역사님, 국회관계자분들 덕분이었습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소란스러웠던 오늘의 기자회견이
우리가 충분히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기자회견 전문
내일인 5월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날하면, 많은 분들이 어린이가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놀러가는 장면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런데 어린이날을 제외한 364일동안,
어린이들은 어디에서 놀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도시는 어린이에게 ‘놀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아파트에 살지 않는 어린이는 놀이터가 없어서 거리를 배회합니다. 7만 개가 넘는 놀이터가 있지만, 그 중 공공 놀이터는 1만 여 개에 불과합니다.
인스타 ‘핫플’이라 불리는 카페와 식당,
심지어는 공공이 운영하는 도서관조차
‘노 키즈 존’이 되어버렸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 갈 곳 없는 어린이에게는
편의점에서 핫바를 사먹는 것이 유일한 여가입니다.
‘노 키즈 존’은 ‘노 양육자 존’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아이를 키우는 23개월 동안 새삼 배우고 있습니다.
아이를 집에서만 돌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는 늘 바깥에 나가서 놀자고 합니다.
부모로서 다양한 광경을 살펴볼 수 있는 세상을
구경시켜 주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물론 바깥에 나가야 시간이 잘 간다는 것이
솔직한 엄마로서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합니다.
유아차를 끌고 버스를 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식당이나 카페를 가도 영유아를 위한 ‘아기 의자’가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허다합니다. 큰 관광지에 가도 수유실은커녕 기저귀를 갈 수 있는 기저귀갈이대조차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자회견을 준비하며 되짚어보니, 지금은 그나마 있는 수유실에 기저귀갈이대가 보통 같이 있는데, 위생을 고려한다면, 더 나은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가족은 앉을 곳이 없고, 용변을 처리할 곳도 없는 것이 2023년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사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노키즈존’이라는 안냇말을 잘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보니 어쩜 이렇게 가고 싶은 예쁜 카페, 식당들은 ‘노키즈존’ 뿐일까요.
선택지를 고르고 고르다보면 남는 건 결국 ‘키즈카페’가 있는 대형마트 그리고 백화점 뿐입니다. ‘키즈카페’의 입장료는 커피 몇 잔을 훌쩍 넘을 만큼 비쌉니다.
온 사회가 “어린이는 모두 키즈카페로”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왜 아이를 낳아서 고생이냐”는 말로도 들립니다.
그래도 엄마,아빠는 주말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키즈카페로 향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노 키즈 존’이 아닌 ‘퍼스트 키즈 존’입니다.
‘노 키즈 존’이던 카페도 어린이날만큼은
‘예스 키즈 존’으로 둔갑하곤 합니다.
최근 제가 자주 이용하는 육아커뮤니티, 그리고 카톡방에서는 ‘어린이날만 예스 키즈 존’인 카페와 식당 등에 대한 성토가 며칠째 계속 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어린이날마다 많은 정치인들이 어린이를 환대하는 메시지를 냅니다. 그러나 5월 5일 어린이날에만 육아와 돌봄이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날 하루만 어린이를 환대할 게 아니라,
매일매일 어린이를 환대하는 사회가,
어린이와 어린이를 돌보는 양육자들이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참 많은 분들이인구위기의 심각성을 말씀하시는데,
왜 어린이와 어린이를 돌보는 양육자들의 일상은
인구위기의 대책으로서, 주요 의제로서
논의의 장에서 다뤄지지도 않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에 저는 2023년 제101회 어린이날을 맞아,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엄마로서
‘노 키즈 대한민국’을 ‘퍼스트 키즈 대한민국’으로
만들기 위한 세 가지 변화를 제안드립니다.
첫 번째, 공공시설부터 ‘노 키즈 존’ 없애나갑시다.
공공시설조차 합리적 이유 없이 ‘노 키즈 존’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만 16세 이상만을 이용자로 삼으며,
초등학생 이하 연령은 아예 출입할 수도 없습니다.
비단 국립중앙도서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천의 모 시립 도서관, 대구 모 구립 도서관 등 여러 공공시설에서 ‘중학생 이상 이용가능’ 표지판을 걸어 붙이거나 어린이 방문자를 자체적으로 차단하는 사례가 발생한 바 있습니다.
공공시설조차 ‘노 키즈 존’을 관행 삼아서는 안됩니다.
국가 차원의 공공시설 어린이 접근성에 대한 촘촘한 전수조사가 필요합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으로서 각 지자체에 공공시설 내 어린이 접근성에 대한 전수조사를 촉구합니다.
‘노 키즈 존’이 공공시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부가 당장 시행할 수 있는 공공시설부터 ‘노 키즈 존’을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개선책을 마련하겠습니다. 해당 개선 과정을 토대로, 사회제도 전반의 변화 방향도 모색하겠습니다.
더불어 기존의 공공시설 ‘노 키즈 존’ 문제 뿐만 아니라
너무나 부족한 공공 놀이터를 비롯해,
어린이가 자유롭게 여가를 누릴 수 있는 공공시설이
확대되도록 정부부처와 지자체에 촉구하겠습니다.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 때까지 집요하게 변화를 만들어내겠습니다.
둘째 어린이의 여가권을 보장하고 돌봄의 공공성을 확대하는
한국판 ‘어린이 패스트트랙 제도’를 도입합시다.
최근 일본에서는 저출생 문제의 해법으로
‘어린이 패스트트랙 제도’를 추진겠다고 밝혔습니다.
어린이 패스트트랙 제도는 어린이 동반 가족과 임산부가
박물관·미술관·공원 등에 줄 서지 않고 입장시키는 제도입니다.
양육자를 위축시키고 눈치보게 만드는 사회가 아닌
가장 먼저 환대하고 포용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키즈카페를 넘어선 다양한 여가공간을 보장해야 합니다.
어린이 패스트트랙 제도는 ‘어린이가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출발점입니다.
나아가, 돌봄의 공공성을 확대함으로서 초저출생 사회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남은 임기동안 한국판 ‘어린이 패스트트랙 제도’ 입법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추진하겠습니다.
셋째, <평등법>을 제정해
누구도 거부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노 키즈 존’으로 시작된 사회적 배제는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노 유스 존’, ‘노 중년 존’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 되었습니다.
어느 새 모두가 나와 다른 사람, 조금 서툴고 느린 사람도
마땅히 시민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상식을 잊어버린 겁니다.
조금 더 빠르고 편리한 일상을 위해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길들여진 겁니다.
어린이는 세상을 처음 배우는 동료 시민이기에
모든 게 느리거나 서툴고, 미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린이이거나, 어린이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첫 순간에 느리고 서투르며,
언제나 처음 배우는 일에 미숙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빠르고, 능숙하고, 성숙하기만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빠르고 능숙하고 성숙한 사람들만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느리고 서툴고 미숙해도 괜찮은 사회입니다.
어린이를 차별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사회입니다.
제가 <평등법>을 동료의원님들과 함께 발의한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21대 국회의 마지막 1년을 앞둔 지금까지도
본회의 상정 조차도 미지수인 상황입니다.
저는 5월 국회를 ‘패스트 국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야3당이 ‘노 키즈 존’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차별에 반대한다면,
5월 중 <패스트 국회 연석회의>를 소집해,
<평등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려야 합니다.
2년 전, 이 자리에 제 아이와 함께 섰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저는 채 돌이 되지 않은 아기를 끌어 안은 채,
국회부터 ‘노 키즈 존’이 아닌
‘예스 키즈 존’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났지만 국회에서도, 국회 밖에서도
아이와 함께하는 일은 어렵기만 합니다.
0.78명이라는 세계 최하위의 출생률을 극복하려면
양육자와 어린이를 거부하는 사회부터 바꿔야 합니다.
인구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린이를 돌보는 일이
개별 양육자의 몫이 아닌 사회 전체의 책임이 되어야 합니다.
제101차 어린이날을 맞아, 국회의원이자 워킹맘으로서
‘노 키즈 존’을 ‘퍼스트 키즈 존’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2023년 5월 4일
제101회 어린이날을 맞아
기본소득당 상임대표 용 혜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