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ㅣ 이른바 '중요한' 콘텐츠를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소속된 사회에 자신의 밥줄을 빚지고 있다. '중요한'이라는 기준은 사실 매우 주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은 중요한가.
이태원 참사 사건은 중요한가.
천안함 사건은 중요한가.
소액주주 권리를 지금보다 신장시키는 것은 중요한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물론 어떤 똑똑한 사람들이 위의 이슈들이 모두 중요한 것들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이슈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설득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중요해지는 것이다. 사실은 설득하는 사람의 지성이 아니라 설득 당하는 사람들의 지성이 이슈의 중대함을 만든다는 얘기다.
인공지능 얘기가 워낙 핫하다보니 요즘 일부 기자들은 그런 얘기를 한다. 인공지능 사회에서는 인간 기자가 잘 쓸 수 있는 콘텐츠에 집중하면 된다고. 이는 사안을 너무 간단하게 보는 것이다.
인공지능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다. 당연히 모든 결과값이 그 쪽에 유리하게 구부러지게 된다. 이 과정을 자연빵으로 방치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압도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콘텐츠의 홍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대규모 자본의 논리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이슈를 봤을 때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될까.
인간 기자가 뭘 쓰게 될지 모르겠다. 쓰는 게 대규모 자본에 이로운 방향이라면 그냥 똑같은 '인간 봇'이 되는 셈이다. 인공지능보다 효율이 좋기 어렵다. 반대 방향?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대규모 자본과 결이 다른 방향의 콘텐츠를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그 기자의 콘텐츠가 좋은 콘텐츠이고 중요한 콘텐츠라는 걸 깨달을 수 있는 독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에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말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 공산주의를 말하는 사람은 안쓰러운 취급을 받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회라는 바운더리 안에 있어서 생활이 가능했던 엘리트들은 이제라도 연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수요가 없는 세상에서 공급자는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