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ㅣ 0. 한국 정치판에 당분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재명 체포동의안 부결 보니, 아 역시 한국 정치 재미있다....
1. 동료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은 평상시라면 뭐 자유롭게 토론하고 투표해서 결정할 일이다. 다만 지금은 그런 조건은 아니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가 임기 이후 벌인 이런 저런 실책에도 전혀 제동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정 문제에 대해 다양한 지점에서 비판이 나오니까 오히려 온 나라를 검사 공화국으로 만들어서 상황을 돌파하려는 움직임도 나온다. 방통위 등 몇몇 주요 보직들은 문재인 정부 인사들이 아직 일하고 있는데, 그곳들의 임기도 곧 만료된다. 아마 그 자리들에도 검사가 들어가지 않을까. 그럼 MB 시즌 2가 재현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야당 당대표인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명확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웬만하면 부결시키는 게 맞다고 본다. 지금 상황에서 체포 동의 쪽에 표를 던지는 것은 정세 파악 능력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자기 정치를 위해 이재명 축출에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내린 선택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싶은데...
2. 나는 이재명 지지자는 아니다. 다만 내용을 좀 살펴보니 정부 여당과 각을 세우는 위치인 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왜 통과시켜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일단 검찰이 접수한 구속영장을 보면 매우 장기간 수사가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명확한 혐의는 없는 것 같다. 나중에 한 번 더 구속영장을 치기 위해 아껴뒀는지 모르겠지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장동 관련해서는 '혐의가 이것밖에 없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개중에 성남시 환수 이익 관련해서는 숫자도 틀렸다)
혐의들과 구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이재명과 범죄 사실 사이에 중간책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하나씩 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물증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재명이 다 시켰다'라고 하면 유죄가 되고, 그런 증언이 없으면 무죄가 되는 내용들이다. 증언 번복을 원하는 수사기관이야 이재명 구속으로 대세가 기울었음을 증인들에게 주지시켜주고 싶겠지만, 국회의원 특히 야당 의원들이 그런 장단에 함께 춤을 출 이유는 없어보인다.
3. 사실 솔직히 지금 상태로라면 2차 영장을 칠만한 혐의가 더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검찰은 항상 창의적인 수사를 해왔으므로 뭔가 히든카드를 남겨두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4. 아무튼 중요한 것은 민주당에서 '여기 이재명 잡아가시오'라는 이탈표가 30표 이상 나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것은 이재명 리더십의 심각한 문제다. 그러니 이재명 입장에서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재신임이라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혹시 체포동의안이 한 번 더 올라오면 그때는 부결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탈표가 나왔다는 건 이재명이 당대표 생활을 잘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뭐 난상토론을 하든, 멱살잡이를 하든 그동안 쌓여있던 앙금을 다 털고 대표로서 자신을 재신임해줄지 말지를 확실하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번 표결 전에 압도적인 부결을 자신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국회의원 뺏지 달고 있으면서도 앞에서는 네네 부결할게요 하고 뒤에서 찬성표 던지는 소심한 의원들이 민주당에 20명 이상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원들은 아무리 많아봐야 국정 운영에 1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까 이재명 측은 그런 의원들이 제대로 말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고, 반 이재명 의원들은 거기서 비판과 지적을 제대로 하고, 다 까놓고 대화를 나눈 후 화합이든 분열이든 뭔가 깔끔하게 결론을 내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5. 사실 민주당 정도의 정치력을 보이는 정당에 169석이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기회에 체급에 맞게 분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